어느 날의 일이다.

 

손이 두툼한 노인이었다. 낯선 사람이 선생님 길 좀 어쭙겠습니다, 라고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곧바로 진짜 용건을 눈치챘다. 격식을 차리진 않았으나 말끔한 바람막이 차림이었다.

 

학교에는 가끔 독특한 손님이 찾아온다. 무한동력이나, 혹은 비슷한 초월 원리, 기이하고 신비로우며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발명의 도안을 들고오는 분 말이다. 벽걸이 달력을 수 장 뜯어낸 설계 용지는 누렇게 빛이 바랐다. 두꺼운 매직으로 복잡한 도형이 그려져있는데, 이 '복잡함'은 사실 '난잡함'이다.

알아보기 매우 불편하도록 여러 번 덧그린 그림. 결결이 갈라진 매직으로 적어내린 작은 글자.

 

나는 탁자 위에서 내려놓은 두루말이가 둘둘 펼쳐서 나뒹굴기 시작하자 내 직감에 찬사를 보냈다. 역시! 이번 학기에도 어김 없이!

 

그러나 내게 노인이 달갑지 않았듯, 노인 역시 한 눈에 보아도 내가 영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노인은 두루말이를 다시 말아주는 나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노인은 교수를 찾고 있었다. 특히 물리학과 교수를 원하고 있었다. 그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내쫓을 핑계는 마땅찮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난처했다. 경비 팀 전화번호를 저장해둘 걸 그랬어. 하지만 눈 앞에서 신고했다가 얻어맞기라도 하면 어떡한담?

그 때 마침 나와 면식 있는 교수님이 이리로 걸어왔다. 내 열렬한 눈빛을 알아보았을 리는 없고, 나와 노인이 어정쩡하게 서있던 길목에 우편함이 있었던 까닭이다. 꾸러미를 꺼낸 교수님에게 노인이 물었다.

 

교수님, 혹시 여기 물리학자가 어디있지요.

 

교수님은 연극 대사처럼 어잉? 하는 큰 소리를 내시더니 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냐!

 

나는 깜짝 놀랐다.

어째서 대뜸 반말을 하시는가?

그러나, 어쨌거나, 교수님은 친절히 노인을 안내하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었다. 교수님은 자, 갑시다 하더니 물리학과 건물까지 걸었다. 노인이 가까이 따라붙어 걸었다. 초조한 내가 멀찌감치 뒤따랐다.

 

물리학과 학과 사무실 앞에서 교수님은 생텍쥐베리가 어린왕자에게 양을 그려주듯, 원하시는 물리학자는 여기서 찾아보시게, 외치곤 경쾌하게 건물을 떠났다. 노인은 사무실 입구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나도 이젠 될 대로 되라지 싶어 교수님 뒤를 따라 걸었다. 뒤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그 와중에 나는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틀림없이 들었다.

 

하, 당해보라지!

 

교수님은 생물학과에 재직 중이시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자동화 기치료 안마기를 홍보하는 싸구려 포스터가 생물학과 온 건물 복도 사방천지에 나뒹굴지 않았나?

……

 

교수님?

 

 

20170525 찬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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