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날이 흐른다. 지난 7월부터였을까? 매번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늘 잠시라도 틈이 나면 누군가 한 사람을 생각했다. 마치 1인극의 배우와 1인의 관객처럼 머릿속에 구도가 펼쳐졌고, 나는 누구 한 사람을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그건 때때로 가족의 한 사람, 나의 옛 연인 중 한 사람, 내 친구 중 한 사람, 그리고 이름을 붙이기 난처한 또 다른 몇몇 사람들과, 내 연구실 동료, 그리고 내가 거쳐온 몇몇 분의 지도교수님 중의 한 명의 사람이었다.
상사병은 예술인의 망상의 산물이라 생각해왔다. 상사의 열병을 핑계로 사랑을 고백하는 풍경에 나는 뾰족하게 소리 없이 웃곤 했다. 너를 사랑해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죽게 내버려두라는 말을 떠올렸다. 나는 상사병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팔짱을 끼고 문턱에 서서 어깨와 머리를 기울여 문 틀에 기대어 서있는 듯한, 비스듬한 마음이 되고는 했다.
그러나 컴퓨터로 치자면 유휴시간으로 남았어야 할 모든 휴식의 순간에 타인을 떠올리다 나는 오늘 드디어 생각했다. 이러다 죽겠구나. 죽을 수도, 있겠구나.
*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미니 가습기를 만지작거리는 중이다. 딱 레몬 모양에 레몬 크기의 조잡한 가습기는 별 쓸모가 없는 잡동사니인지라 겨울에는 힘을 내지 못하고 여름에는 쓸 이유가 없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받은 물건이라면 도통 처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끔 오늘처럼 난처해하며 만지작거리곤 한다.
가족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경험이 거의 없다. 내게는 그런 가까운 사람이 없다. 내게 세상은 창 밖의 일이어서, 내가 아무리 바라본들 나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그저 흐르듯 지나가는 무수한 발걸음이다. 가끔 흘긋 얼굴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서늘한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가 있는 방향을 훑을 뿐이다. 이런 말을 하면 또 친구 K는 질색을 하겠지. 나의 고독을 좀처럼 용납하지 못하는, 다정하고 열이 많으며 뒷끝은 없지만 고집이 센, 나의 친구 K.
관심이 없는게 아니라 네가 뭘 좋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라며 K는 먹을 것이나 일회용품을 내게 건넸다.
알아, 내가 좀 신비주의지? 나는 각종 간식거리가 조금씩 모아 담긴 커다란 박스를 넘겨 받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도 K는 가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책을 찾아 가져오곤 했다. 나와 K, 우리 둘이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수 년 전의 일이다.
선물을 고르는 일은 본디 어렵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물건일지,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일지, 혹은 상대가 선물 보다 앞서 그것을 손에 넣지는 않을지,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성공적인 선물이 될지 어떨지, 마지막엔 운도 따라줘야 한다. 과정을 자기 만의 은밀한 비밀로 남겨둔 채 홀로 얼마나 상대방을 깊이 오래도록 생각해야 선물을 결정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마침내 전해진 선물은 물건 그 자체보다는 그 고단한 과정을 거쳐온 사람의 마음이 무거워,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비록 그것이 아무 쓸모가 없다 해도.
레몬 가습기를 다시 만지작거린다. 이음부가 단선될까봐 부드러운 피복을 덧입혔다. 실용적인 선물이 아니면 안될 성 싶어 멀리까지 나가 사왔다고 했다. 그만큼 고민해서 사온 망한 선물이란 점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절대 헤아릴 수 없다.
*
타인을 생각하는 일은 그다지 보람 찬 일이 아니다. 나는 비스듬히 기대는 마음으로 눈을 내리 감았다. 단단히 얽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고, 플라스틱 레몬을 쥔 오른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마디가 붉어졌다. 나는 울지 않고 눈을 뜬다.
20181124 찬날
'신변잡기 > Blue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세상에 네 모양의 구멍이 났어 (0) | 2021.08.04 |
|---|---|
| 2015년의 무제 (0) | 2021.08.04 |
| 내게 내려진 세 개의 저주 (0) | 2021.08.04 |
| 유리의 다리 (0) | 2021.08.04 |
|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멈추는 날 (0) | 2021.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