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짓말을 잘 한다. 아니, 아니다. 무척 못한다. 하지만 20년 넘게 거짓말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더니 이제 다들 내가 거짓말을 해도 어련히 사실이라 믿어주는 지경이 되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를 받으며 비굴하고 다급한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안다. 내가 학과 사무실과 통화하는 모습을 본 연구실 선배가 허 참, 하고 어이없어하는 소리를 내곤 했다. 나는 웃었다. 아, 정말 긴장했다구요. 진짜 진짜! 선배는 아니야, 뭐라하는 게 아니야, 잘했어, 라고 말하곤 자기 실험대로 가버렸다.
요즘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 나는 여러 번 꽤 아팠다. 팔목에 얼룩말처럼 물집이 돋아나더니 대상포진이라 했고, 열흘 넘게 뇌수막염으로 앓아 드러눕기도 했고, 원인 모를 감염증으로 목소리가 나지 않은 날도 있었다. 한참을 연달아 아픈 후에 나는 내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음을 천천히 깨달았다. 나는 농담을 줄이고, 더 소리 없이 웃고, 음악을 더 많이 듣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아는 게 싫었다. 나도 모르게 준비해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행동이 싫었고, 너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싫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며 나를 관찰한 결과를 늘어놓는 게 싫었다. 나는 그래서 늘 괜찮네요, 그래요, 라고 대답하거나 그게 마음에 드세요? 하고 되물었다. 진심으로 좋아해, 저 이거 좋아해요, 맘에 들어요, 라는 말을 하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고 떠올렸다. 나는 늘 말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한다.
오래 전에 내게는 내가 한 거짓말을 모으는 작은 메모장이 있었다. 이 사람에겐 이렇게 말했고, 저 사람에게 저렇게 말했으니, 이 둘이랑 동시에 만날 때 이 얘기는 이렇게 끼워맞추자. 그런 고민으로 밤을 불태우던 때가 있었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 상대가 나를 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상황이, 상대방의 넘겨짚는 언행이, 너무나 싫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었을텐데. 하지만 혹시 알아? 다른 사람도 모두 내게 거짓말을 할지도 모르지. 나는 나와 비슷한 성질머리의 친구 밖에 없으니 개네는 다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가 뱉은 말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거짓말이 나를 향하면 나는 남을 속일 수 없다. 얼마 전에는 내가 오래 전에 한 말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났다. 다행히 말이 엇갈리지 않았다. 무사히 대화를 넘기고 나니 무척 피로했다. 커피를 마시며 기력을 회복하고 있자니, 희미한 위기감이 다가섰다. 나는 이제 더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여전히 거짓말을 했고, 대신 거짓말이 거짓말로 남지 않도록 애써보기로 했다. 너 이 애니메이션 알아? 좋아해? 나 안 봤거든, 보고 싶은데 구글에 검색하면 스포일러 당하잖아. 너는 잘 알려줄 거 같아서 물어봤지. 나는 친구에게 줄 선물로 백화점에서 토토로가 그려진 찻잔 세트를 샀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한대로 토토로를 보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영화 '토토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으로 감상하게 되었다.
사실 다 거짓말이다. 아마도.
20180925 찬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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